하나님과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을 이루어 영원히 하나된 것처럼,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과 우리의 거처인 땅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부활한 존재로서
회복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로새서 1:20)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라고 크게 외치셨다.
이 말씀의 원어인 헬라어 ‘테텔레스타이’(tetelestai)는
빚이 청산되었을 때 부채증서에 가로질러 썼던 말로서
‘완불되었다’라는 의미이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0:17~18)
사람의 유용성은 고난을 받았는가에 있지 않고
고난으로 인해 순종을 배웠는가에 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순종을 배워야한다.
마음이 부드럽지 않은 사람에겐 항상 고난이 따른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브리서 5:8~9)
청결한 마음이란 오직 하나님만을 원하고
하나님께 바르게 초점이 맞추어진 것으로,
우주 가운데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없다고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
청결한 마음만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 빛을 볼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8)
천국은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그곳에 스스로 이를 수 없다.
육신으로 한 번 태어난 사람이 저절로 가게 되는 곳은
지옥 뿐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5)
우리가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본향에 거하길 소망한다면,
그곳에 이르기 전에 그곳에 관한 모든 정보를 얻고
그곳에 관해 충분히 알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곳은 또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겠다고
약속하신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로새서 3:1)
거짓말은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고, 무익한 말을 하고, 제멋대로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 받지 못하고 다만 심판을 기다릴 뿐이다.
더럽고 추악한 말을 일삼는 사람은
그 말과 같이 더럽고 추하고 악한 사람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12:36~37)
성령의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려면
그 사람의 말에 절제가 있는지 없는지,
즉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말을 다스릴 수 있다면
온 몸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절제하는 삶이 곧 성령의 열매이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야고보서 3:2)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으로 죄악의 세계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죄악의 세계를 가지고
곳곳에 사망을 퍼뜨리고 지옥 불을 붙인다.
사람의 혈기, 성질, 분노는 다 혀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혀는 지옥 불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야고보서 3:6)
우리는 사람과 다툼이 생길 때 마다,
그 사람과 직접 관계를 맺고 해결하려 하는지,
아니면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마음을 바르게 맞춘 뒤에
사람과 관계를 맺는지 자문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바르게 맞춰질 때에
모든 것이 밝아지고 비로소 사건을 정확히 볼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시편 123:1-2)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주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그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한복음 6:28~29)
‡ 성령의 내주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내면적 자아이다.
나의 영은 나의 내면적 자아이다.
성령은 나의 내면적 자아를 새롭게 하시고,
그 안에 거하시며 충만하게 하신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린도전서 2:11)
‡ 영으로 드리는 예배
육체를 만족하게 하는 예배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는 예배가 있다.
육에 속한 우리가 영 안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고 난 이후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면
우리는 육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속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 안에서가 아닌 영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24)
‡ 선한 말을 하라
사탄의 손 아래 있는 사람은 다 거짓말하는 자이다.
구원 받은 후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거짓말, 정확하지 않는 말, 과장된 말
그리고 의미 없는 말을 거절하는 것이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에베소서 4:29)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기 전에
먼저 그의 몸을 지으셨다.
이스라엘의 경우도 성막과 성전을 완성한 후에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그것을 차지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이 먼저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에스겔 36:26~27)
영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와 같은 곳이요,
혼은 자기를 의식하며 자아가 거하는 곳으로 성소와 같은 곳이요,
몸은 감각이 거주하며 바깥 세상과 접촉하는 곳으로 뜰과 같은 곳이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이심과 같이 사람도 영, 혼, 몸의 삼중적 존재로
지음받았다.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전서 5:23)
영적인 세계가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일을 알 수 있는 요소가
우리에게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시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은 영원히 영적인 것이므로
육으로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린도전서 2:12~13)
예수님은 자신의 평강을 방패 삼아 온갖 싸움에서 이기셨다.
그는 하늘로 떠나시기 전에 그 평강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평강을 받아 위험에도 침착함을,
어려움 속에서도 평정을,
불안할 때에도 평안을 누려야 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 성경은 유일한 안내서
성경이 명한 것은 선한 것이요, 성경이 금한 것은 악한 것이다.
성경이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은 것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으로,
각 개인의 판단과 양심의 자유에 맡겨야 할 문제이다.
성경만이 우리의 유일한 안내서요,
우리의 믿음과 행위에 적절한 지침서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사도행전 24:16)
‡ 죄의 깊이와 사랑의 깊이
우리가 우리의 죄의 깊이를 알면 알수록
주님의 사하심의 크기를 보게 되고,
그로 인해 주님을 더욱 많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누가복음 7:47)
‡ 말씀에 기초한 구원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누가복음 8:48)
‡ 말씀에 근거한 구원
우리 자신이 영생을 얻었고 구원 받았음을 아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을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한복음 6:47)
죄가 심판을 받아야만 죄로부터 온 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주 예수님의 구원이다.
그가 죽으심은 죄의 결과를 책임지신 것이고,
그가 피를 흘리신 것은
죄의 심판을 해결하신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4)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시기 위해서 오직 말씀만 하시면 되었다.
그러나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이 땅에 내려오시어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다.
하나님은 그의 생기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의 피로 인간을 구원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1:7)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는 이방인이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는
이방인의 조력을 요청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포함된 교회의 모습이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성전인 것이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로마서 9:24)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은사 즉 영생을 얻게 되고,
그를 따르면 상급을 얻게 된다.
영생은 믿음으로 얻는 것으로 세상 사람에게 주시는 반면,
상급은 충성과 선한 행실로 얻는 것으로써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16:27)
마음에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는 사람만이
아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성경은 오직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만 인정하므로
그 외의 모든 것은
다 사람의 이상과 거짓에 불과하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9)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해 일하는 것을 의미하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대신하여 일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죄가 결코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
이것이 승리의 길이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로마서 6:14)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대신 사시는 데에는 조건이 있다.
이 조건은 자신이 할 수 없음을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오직 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서만
대신 사실 수 있고, 그분의 승리는
완전히 실패한 사람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성 어거스틴은 자기의 가족이라고 하여
악하게 되지 않는다는 법이 없다고 말하였다.
• 아담에게는 살인자 가인이 있었다.
• 노아에게는 비웃은 함이 있었다.
• 아브라함에게는 박해자 이스마엘이 있었다.
• 이삭에게는 불경한 에서가 있었다.
• 다윗에게는 불효한 압살롬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는 배신자 가룟 유다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신명기 24:16)
죄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보다
절망과 가책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지대한 역할을 한다.
“모든 절망은 악마로부터 나온다.”라는 말은
언제나 사실이다.
신앙 생활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 낙심이요,
가장 권면할 만한 것이 담대함이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브리서 10:35)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언 28:1)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을 슬퍼하여 운 것이 아니라
축복을 놓친 것을 슬퍼하여 울었다.
우리 역시
죄 그 자체를 슬퍼하지 않고,
죄가 가져다 준 결과를 슬퍼한다.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창세기 27:38)
우리가 구하지 아니하면 얻지 못하지만,
기도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아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다 할 때,
하나님도 그의 책임을 다 하신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언 28:9)
우리는 높은 지위나 세상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금해야 한다.
우리의 나날은 우리를 섬기는데 있지 않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리스도가 행하신 모습대로 우리도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뿐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특별한 사람으로 비쳐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로새서3:23)
‡ 감당할 만한 시련
만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어떤 시련을 허락하신다면,
그 시련은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비록 감당하기 힘든 것이라 할지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혹은 땅이나 공중의 세력,
그 어느 것이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건드릴 수 없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태복음 10:30~31)
‡ 현재 삶에서의 구원
예수 그리스도는 현재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죄의 권세와 지배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고,
또한 그의 놀라운 권능을 통하여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기 위해 오셨음을 깨닫고 믿어야 한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이
장차 천국에서 우리가 얻을 미래의 구원 보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 받아야 함을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누가복음 1:74-75)
‡ 참된 믿음의 생활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한 의지로 사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 퇴보하는 이유는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가 전과 같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의 생활은, 영이 의지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생활이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지하리니 Though he slay me,
yet will I trust in him:” (욥기 13:15, KJV 참조)
‡ 믿음
우리는 자신에게 믿음이 없다고 느끼면,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도 않는다.
반대로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느끼면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맡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고
그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 확신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약속하지 않았는데 우리의 바람대로 줄 것을 믿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몽상이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로마서 4:21)
‡ 믿음은 과거형
성경에는 오직 한 가지 믿음, 즉 얻은 믿음 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또한 부활하셨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이미 완성되었으며, 이 소식 역시 전파되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구원해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과거형으로 말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믿지 않는 사람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4)
‡ 성령과의 사귐
어떤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사귀어 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령을 알려면 그와의 사귐을 통해,
그에게 사로잡히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
성령 안에 사는 삶을 누리는 것이 그를 알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성령이 자신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리고 그 믿음을 변함없이 유지하라.
그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맡겨라.
그는 유일하게 우리의 삶을 이끄는 분이시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린도전서 1:9)
‡ 선악을 알고자 하는 욕망
사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추천하면서
지식이 인간을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시켰다.
인간은 순종의 삶이 아닌 지식의 열매를 택함으로 사망을 낳는 끔찍한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선악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에게는 가장 큰 유혹이었다.
그의 성품은 전적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지식은 순종이나 생명보다 그에게 있어 더 중요하게 되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5)
‡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항상 남을 가르치려 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험한 위치에 두는 사람이다.
그 같은 사람은 지나치게 자신을 과장하여
아직 체험하지 않은 것들을 강론함으로,
단순한 성도들의 마음에 많은 문제를 만들어낸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야고보서 3:1)
‡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삶
하나님의 영광은 지성소의 속죄소 위 두 그룹 위에 있다.
이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통의 근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해야 함을 보여준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속죄소 위에 뿌려진 보혈이 있어야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에 손상이 없어야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 수 있으시게 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 하나님 앞에 담대함 갖기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여시어,
하나님 앞에서의 의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자유 함을 얻어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담대함으로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에 있어 하나의 필요한 조건은 우리의 담대함이다.
담대함 없이는 참다운 기도를 할 수 없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
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에베소서 3:12)
‡ 시간 관념 벗어나기
이것은 하나님은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시고, 시간을 초월하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시간에 묶여 있으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지만,
하나님께는 지나간 과거가 없고, 다가올 미래도 없으며, 모든 것이 다 현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영적인 도움과 체험을 얻고자 한다면,
시간 관념을 벗어버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현재의 하나님이시며, 오늘의 하나님이시며,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베드로후서 3:8)
‡ 육체의 선행인가, 새 생명의 선행인가?
육체가 행한 선과 새 생명에 의하여 행해진 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육체는 자아를 중심으로 삼아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기에, 하나님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도 없으며 스스로 생각하고 결심하며 행동한다.
그리고 이렇게 행해진 선행들로 매사에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며,
‘이제는 과거보다 좋다. 지금 나 자신은 나쁘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중심으로 삼는 육체의 선행은 하나님 보시기에 항상 악하다.
‡ 누가 가장 위대한 성도인가?
많이 기도하고 금식하고 또 많이 구제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절제와 인애와 공의에서 뛰어난 사람인가?
둘 다 아니다.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사람,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행해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
언제나 이 모든 것 때문에 하나님께 찬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도이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가
가장 훌륭한 성도이다.
‡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송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 할지어다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 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 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그가 또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의 말씀을 따르는 광풍이며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이며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 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 (시편 148:1~14)
시편 148편은 피조물들과 인간들이 지음 받은 것에 대해 창조주를 찬양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시편과 요한계시록에만 언급되어있는 할렐루야라는 단어는 특히 시편 마지막 부분에 많이 기록 되어있습니다.
‘할렐루야’의 ‘야’는 여호와의 줄임말이고, ‘할렐루’는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그 둘을 합하면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의미의 히브리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곳에 많은 피조물들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시편의 말씀대로 하면 피조된 모든 것은 지음 받은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본분이며, 148편에는 구체적으로 찬양해야 될 존재들을 가리켜주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하늘의 천군천사들로부터, 천체나 각종 땅에 있는 것, 바다에 있는 모든 생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밝은 빛을 내고 있다는 것은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빛을 통해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만든 어떤 물건이 누군가에게 나의 본성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태양과 달과 별이 바로 하나님의 속성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즉, ‘하나님은 빛이시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7절에 나오는 용은 지금은 멸종된 공룡들을 가리킵니다. 과거 쥐라기 시대를 상상해 볼 때 사람의 모습은 그들에 비해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했을 것이고, 천지를 진동시키며 뛰놀던 공룡들의 위엄에 아마 입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덩치가 큰 짐승이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능력 있으신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사람 스스로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어마어마한 물건을 봤다고 하면 그것을 만드신 분이 더 위대해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흔히 자연현상 중의 하나인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나 안개도 하나님의 명(命)대로 움직이도록 그분께서 창조한 것입니다. 분명히 바람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 계시다고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이 모든 자연현상들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찬양해야 될 존재는 우리 같은 미천한 존재뿐만 아니라 자기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모든 왕들과 고관들, 땅의 모든 재판관들도 포함될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기 전 창세기 처음에 지음 받았던 모든 생물들은 어떤 경우든지 감사와 찬미를 하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그때처럼 시편 148편은 모든 피조물들이 해야 할 본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찬양이 중간에 끊어진 상태이지만 분명히 때가 되면 그 일들은 다시 일어 날 것입니다.
그 회복에 대한 내용은 요한계시록 4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4:1~11)
이 내용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우리 육신의 눈이 감기고 영의 눈이 열려서 하늘을 바라보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공중에 하늘이 열려 그 속에 하나님이 앉아계시는 보좌가 있고, 그 둘레에는 무지개가 있으며, 그 앞에 이십사 보좌들이, 또 그 앞에 유리바다가 있고, 네 생물들이 존귀와 감사를 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네 생물들은 그룹들의 모습입니다. 이 그룹들은 하늘을 대표하는 독수리, 육축을 대표하는 소, 모든 짐승들을 대표하는 사자, 그리고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늘에 있는 이십사 장로들은 하나님께 세움을 입었던 천사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았던 계급이 높은 천사들입니다. 이들도 쓰고 있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4장은 시편 148편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 앞에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드리고 있고, 이십사 장로들이 시편의 천사들이라고 하면 하늘에 있는 모든 존재들도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구세주 하나님에 대한 찬송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요한계시록 5:8~14)
요한계시록 5장도 4장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찬양에 대한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4장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만, 5장은 구세주인 어린양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4장 내용에 기록 되어있는 그룹들이나 하늘에 있는 천군 천사들은 구원받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찬송 내용은 구원받은 것에 대한 찬송이 아니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에 관한 것입니다. 반면 5장 내용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찬양입니다.
본래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는 모든 만물들이 자신들을 존재케 하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는 죄사함을 받은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어 은혜에 대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된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그 사랑이 표현되었고 어린 양이라고 특별히 호칭도 해주셨습니다. 어린 양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통로였고 그 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이 확증 되었습니다.
따라서 장차 우리가 주님을 만나서 부를 찬송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찬송입니다.
썩어짐에서 해방되기를 고대하는 피조물
시편 148편에서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현재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까?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편 19:1)
하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궁창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편 19:2~4)
이 말씀을 보면 자연은 우리처럼 언어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 분명히 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있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른다.’라는 말씀을 보면 자연이 우리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피조물들은 “당신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솜씨가 놀랍습니다.”라고 얘기할까요? 본래 모든 피조물들은 찬양을 위해서 지음을 받았지만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상황은 달라져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로마서 8:19~21)
피조물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피조물은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성경은 동물도 혼이 있다고 했습니다. 혼은 우리처럼 지각이 있고 느낌이 있고 감정이 있습니다. 피조물들은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요?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로마서 8:21)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자신들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래 지음 받은 대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 피조물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어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땅과 함께 저주를 받아 썩어지고 죽게 되었습니다. 저주받은 상황 속에서 그들의 간절함은 해방이었습니다. 그들도 마땅히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사람의 죄 때문에 땅과 함께 저주를 받아 썩게 되고 죽게 되었으니 거기서 우리도 빨리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을 이르기를 고대하고 있다.’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짐승들이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먹이가 되는 것도 우리에겐 빚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부지런히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써 하나님의 아들이 더 많이 나타나고, 그들이 영광에 이르는 일들을 다 해 피조물들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 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피조물들은 장차 우리가 그 영광에 이르렀을 때 다스릴 수 있는 위치에 있도록 해주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도록 해 주셨습니다. 피조물들이 해방된다는 것은 백성들이 많을수록 왕이 더 영광스러워 지는 것처럼, 장차 우리가 다스릴 때 많은 피조물들이 있으므로 우리의 영광이 더 커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비록 짐승들의 말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 피조물들의 고대하고 신음하는 소리가 온 우주에 꽉 차 있다고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더 열심히 주님을 찬양하고 죄인들을 하나님 앞에 인도하는 일들에 열심을 내야합니다.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우리가 고대하고 있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는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의 찬양이 온 우주에 울려 퍼질 것입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요한계시록 5:13)
사람이 본래 타락했던 그 내용만 없다고 하면 우리는 만물을 지으시고 지금까지 보존시킨 하나님의 창조의 업적을 찬양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의 타락으로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하나님 편에서는 그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는 길을 열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에게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어린양에게 찬송 드리는 놀라운 일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보좌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리는 일들 속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저 영원한 불 못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예수 그리스도 믿기를 거부했던 많은 사람들이 원망과 불평 속에서 살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찬양하는 무리 속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온통 어두움 밖에 없다고 하면 찬양은 나올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이 주신 사랑과 놀라운 지혜를 생각하면 울다가도 웃음이 나오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신 그 내용을 생각하면 내가 슬퍼하는 이 상황은 잠깐이라는 안도와 내 속에 끊임없이 샘물과 같이 솟아오르는 기쁨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 기쁨이 나로 하여금 주님 앞에 찬양하게 만들고 감사하게 만들고 그분의 이름에 존귀와 영광을 돌리게 만듭니다.
“나는 곧 나를 위하여 네 죄를 도말하는 자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임입니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시편 149:1)
새 노래라고 표현되어 있는 이 노래는 경쾌하고 아름다운 감사와 찬양이 있는 노래를 가리킵니다.
온 우주가 이 새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할 그 날이 우리가 바라는 마지막 날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날을 마음속에 항상 사모하고 진정으로 우리의 할 일이 바로 그 일임을 지금부터 깨닫고 항상 마음에 감사와 찬송이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 인간의 본성
|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1:5)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시편 58:3) |
사물을 두드리면 사물의 성질에 따라 서로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무는 나무의 소리를, 쇠는 쇠 소리를 돌은 돌 소리를 낸다. 정작 사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에도 두드려 보면 그 사물의 속성을 알 수 있다. 나무는 쇠의 소리를 낼 수 없고, 돌은 유리의 소리를 낼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속성도 두들겨 보면 알 수 있다. 누가 나에게 계속 머리를 톡톡 치거나 불쾌한 말로 괴롭히면 나의 반응은 즉시 나타난다. 그 때의 반응은 내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죄인은 죄인의 반응을 나타내며 의인은 의인의 반응을 나타낸다. 악한 행동이 나왔다면 내가 악한 죄인임을 드러내 주는 것이고 좋은 반응을 보인다면 내가 좋은 사람인 것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의인이셨으므로 그에게는 죄가 없으셨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두들겨 패도 대항하거나 그들을 향해 욕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을 향해서 불쌍히 여기시고 대신 하나님께 사함을 간구하셨다. 그는 실로 의인이셨으며 그 속에는 죄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없으셨다.
그러므로 주변의 자극에 의한 반응으로 그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사람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결과에 있어 모두가 같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가 밖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즉시 화를 내거나 반격을 시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억울한 일을 당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이유 없이 매를 맞거나 조롱당하거나 창피를 당하게 되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복수를 하려고 계획하며 언젠가는 갚고야 만다. 남에게 당하고만 사는 사람은 바보 멍청이라고 비난을 한다. 그런 사람은 나사가 빠진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몰아붙인다. ‘우리의 이런 반응은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인간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반응을 다시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리의 속성이 어떠한 가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악한 존재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사실 그러하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므로 우리 인간은 모두가 똑 같은 죄성을 갖고 태어났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참을 줄도 모르며 핍박하는 자를 그대로 용납할 줄도 모르며 죄성이 작용하는 대로 화를 내며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선도 악으로 갚는 배은망덕한 존재들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철저히 부패하고 타락되었으므로 외부 자극에 의한 우리의 반응 역시 거칠고 악하며 비열한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 정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누구보다도 잘 아신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틀림이 없다. 우리 인간은 결코 의롭지 못하다. 사람에 의한 자극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눈의 욕심을 이기지 못한다.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보는 것에 자극을 받아 욕심이 속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없던 욕심이 그 때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외부 물건에 의한 내적 반응이 욕심으로 나타나는 것 뿐이다. 탐욕 그 자체는 인간 속에 내재하고 있던 것으로 외적 자극에 따라 작용할 뿐이다.
죄와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죄가 있고 범죄가 발생하는 곳에는 꼭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 스스로도 죄를 미워하고 싫어한다 해도 죄와 스스로 단절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죄는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모든 인간 속에 나면서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끝낼 수도 없고 죄가 없는 곳으로 도피할 수도 없으며 스스로 죄를 다스릴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람이 시끄러운 세상과 죄 많은 인간들을 외면하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 도를 닦으며 깨끗하게 살려고 한다 하더라도 그는 세상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럽히는 것은 바로 자신 속에서 계속 나오는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없애지 않고 산중에 산다고 하면 그 산중도 곧 죄로 오염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죄는 사람을 더럽게 만들고 세상을 온통 죄로 오염시킨다. 사람 자신이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는 결코 죄 많은 세상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피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죄에서 도피할 수 없다면 그는 결코 죄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죄는 우리의 육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폭군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누구도 이 폭군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가 죽는 그 날까지 죄와 불가불 동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가족에게 있는 유전병과도 같아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유전병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하고 또 그 병을 자자손손 물려주는 비참한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 구원 받은 사람이 도달해야 할 목표 지점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받아야 하지만, 이미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그 다음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구원받기 전보다도 더 못한 상황 속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구원 받은 지 40년의 세월이 지났고, 제 주변에도 구원을 받았다고 하며 신앙생활을 함께 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그들 중에는 세상으로 흘러가버린 사람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들도 분명히 한때는 죄 사함을 받고 감사하며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을 하고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연유인지, 마음속에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신앙생활을 전혀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이 정말 구원을 받았겠는가? 구원을 받고도 그렇게 이방인처럼 살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구원받은 간증은 분명했었는데, 그 당시에 간증한 것이 잘못되었는가? 머리로만 구원을 받고 마음에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런 결과가 온 것인가? 아니면 구원받은 것이 확실한데도 그렇게 이방인처럼 살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함께 말씀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20년, 30년 후에는 교제 속에 있지 않고 이방인같이 사는 사람들이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영혼이 죄 사함 받았는지 감별 할 수는 없습니다. 간증을 듣고, ‘아, 저 사람이 구원을 받은 사람이구나.’라고 아는 정도일 뿐, 정말 확실하게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하나님밖에 모르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의 간증을 듣고 비슷하게 흉내를 낼 수도 있고 입담이 좋으면 남보다 훨씬 더 열정적으로, 감동적으로 간증을 잘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된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제는 멸망을 당하지 않고, 생명도 얻었고 천국도 얻었고 내세에 대한 모든 것도 다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구원받은 사실이 하나의 완성인 것처럼 알고, 더 이상 이룰 것이 없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땅에서는 비록 이렇게 살지만, 죽어서는 자신이 얻은 구원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 앞으로 가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게 하는 일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이루어야 하고, 도달해야 될 목표지점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람이 도달해야 할 목표는 어디일까요?
‡하나님의 구원과 상급 !!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9:24
달리기 경주를 보신 적 있습니까? 달리기를 하려면 경기장에 들어와서 번호표를 붙이고 출발 신호에 따라 주어진 코스를 달려야 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경기장에 들어섰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얻은 생명은 천성을 향해서 가는 노정에 막 들어서서 달리기를 시작하려고 출발선에 선 사람이 된 것이지, 그 자체가 완성된 것이나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고 경기장에 들어선 사람은 잘 달려서 상을 얻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복음서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상(賞)’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말씀하시는 이유 중 하나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반면,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직 경기장에 들어오지도 않았으므로 “상”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들이 받을 것은 영원한 지옥의 멸망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주님을 더 잘 섬기고 살아야 한다” “선을 행하고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학교에 입학도 하기 전에 교복을 입고 다니라고 하거나, 그 학교의 규범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죄인은 구원 받는 것이 생애 가장 중요한 일이고 그것이 목표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되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 상 받지 못하는 것 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졸업할 때는 상을 받는 사람도 있고 못 받는 사람도 있지만, 주님 앞에 섰을 때 상을 못 받으면 그것 만으로 끝나지 않고 엄중한 하나님의 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과 우리가 장차 받을 상급을 성경이 구분해 준 대로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으면, 엄청난 혼란 속에서 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과 상급은 명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구원은 상급이 아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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